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느꼈던 것은 문장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표현이 달랐고, 생각을 곱씹어 말하는 문장이었다. 최근 수지와 교육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성숙한 학생은 질문하는 것부터 다르고, 대답하는 것부터 다르다는 이야기였다. 이 책은 내게 신형철이라는 작가가 작가 중에서 ” 성숙한 작가 ” 라는 생각을 심어준 책이었다.

최근에는 어지간해서 인상 깊은 문장을 뽑지 않았는데, 이 책은 달랐다. 문장이 좋다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들어서 인상 깊은 문장을 많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은빈이가 좋아하는지 알 것 같은 책이었다.)

신형철 작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첫 장부터 글쓰기에 대한 엄격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 선언은 단순히 작가의 직업적 소명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는다.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만드는 강력한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글쓰기를 ” 집짓기 ” 에 비유하며, 좋은 글을 위한 자신의 방법론을 하나의 견고한 선언처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글쓰기는 세 단계의 정교한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세상을 새롭게 보도록 만드는 ” 인식을 생산 ” 하고, 그 인식을 담아낼 ” 정확한 문장을 찾으며 ”, 마지막으로 그 문장들을 ” 공학적으로 정밀하게 배치 ”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나는 곧바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내 시간을 생명으로 치환해서 그 가치를 얼마나 헤아려 보았는가. 매일 반복되는 업무 속에서 나는 과연 내 시간, 즉 내 생명을 가치 있게 사용하고 있는가. 작가의 선언은 나태해진 나의 일상에 경종을 울렸다. 삶의 밀도에 대한 성찰을 촉발시켰다.

그렇다면 저자는 삶의 가장 어려운 주제인 슬픔을 어떻게 마주하는가.

이 책의 철학적 핵심은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려는 시도의 본질적인 한계와, 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취해야 할 윤리적 태도를 탐구하는 데 있다. 저자는 타인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슬픔을 겪는 당사자와 그것을 공감하려는 사람은 결코 동일한 선상에 놓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 한계가 인간의 특정 결함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 ”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결함으로 인해, 인간이 배우기에 가장 소중한 것과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일치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 타인의 슬픔 ” 이다. 우리는 결코 타인의 슬픔을 진정으로 배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우리가 그 슬픔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과거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수지를 만나기 이전의 나는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감정적으로 일정 한계를 넘어서면, 마치 스위치가 꺼지듯 회피하곤 했다. 그러나 다양한 관계와 경험을 거치고, 감정이 지닌 힘과 느낌을 점점 더 깊이 사유하게 되면서, 나 자신도 그에 따라 변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전에는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거나 스스로를 속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비교적 올바르게 감정을 마주하려 애쓰고 있다. 물론 여전히 갈 길은 멀다. 다만 이 어려운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이렇게 타인의 슬픔을 향한 어려운 노력은 사랑과 상실이라는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이 책은 사랑과 상실의 불가분성을 시적이고 은유적인 방식으로 탐색한다. 특히 ” 뒷모습 ” 이라는 이미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핵심을 꿰뚫는 강력한 메타포로 작용한다.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 속에서, 한 남편은 달려오는 열차를 피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맞는다. 남겨진 아내는 어느 날 밤, 남편과 비슷한 뒷모습을 한 남자를 무작정 따라가다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

”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돌아봐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뭘 물어도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

이 뒷모습은 남은 자의 어떤 애원에도 결코 응답하지 않는 상실의 절대성을 상징한다. 나는 ” 인간의 뒷모습이 인생의 앞모습이다 ” 라는 표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저자가 오르페우스 신화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하는 부분도 인상 깊었다. 흔히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본 것을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가 ” 제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 ” 이라고 말한다. 이 시선 속에서 사랑과 상실은 하나가 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통찰에 이른다. ” 사랑했던 사람을 두 번 죽여 본 사람은 시인이 될 수 있다.” 한 번은 운명에 의해, 또 한 번은 자신의 사랑으로 인해.

이 두 이야기를 통해 나는 사랑과 슬픔이 서로를 전제하는 ” 대비되는 형식 ” 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이 있기에 슬픔이 있고, 슬픔의 깊이를 통해 사랑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어쩌면 이것이 과거 엄마가 말했지만 내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바로 그 지점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사랑과 슬픔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어디로 이어지는가. 타인에게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더 큰 질문으로 이어진다.

책은 소통과 영향력의 윤리적 차원을 깊이 파고든다. 저자는 ” 폭력 ” 을 물리적인 행위가 아닌 지적인 태도로 재정의하며, 그 대안으로 인내와 섬세함을 제시한다.

” 폭력이란 어떤 사람, 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이러한 폭력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 끝까지 섬세해야 ” 하며,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문학이 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문학은 성급한 판단을 유보하고 ”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 ” 이다.

이 개념은 나의 개인적인 고민과 맞닿아 있었다. 나에게 부족한 것 중 하나가 바로 ” 참을성 ” 이다. 나는 최근 수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세계를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나의 선의가 자칫 강요 혹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을 느꼈다. 이 책의 지혜를 통해 나는 그 해답이 결국 ” 참을성 ” 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의 세계가 가진 매력을 보여주고 그 방향으로 이끌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상대의 몫이다.

그래서 결심한다. 나는 기다려야 하고, 참아야 하며, 나의 세계가 가진 매력을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상대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시간을 온전히 주어야만 한다.

그 다음으로 책은 소설과 시라는 매체를 통해 세상을 어떻게 포착하고 질문을 던지는지 이야기한다.

저자는 단편소설의 본질을 ”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파열의 선 하나를 발견하는 것 ” 이라고 정의한다. 인물들은 삶의 어딘가에서 이 파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지 못하다가,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게 된 후에야 비로소 그것을 깨닫는다. 이 ” 미세한 파열의 선 ” 이라는 개념은, 그동안 내가 비범한 사건에 천착하거나 감수성이 과잉된 일부 소설들에서 느꼈던 미묘한 위화감의 근원을 명쾌하게 설명해주었다.

더 나아가, 저자는 작가와 매체 (언어) 의 관계를 논한다. 어떤 작가들은 언어에 끊임없이 시달리지만, 어떤 작가들에게 문장은 그저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개미 떼와 같다. 그들에게는 ” 매체에 대한 자의식 ” 이 없다.

이 대목에서 나는 나의 매체인 ” 코드 ” 를 떠올렸다. AI 가 코드를 손쉽게 생성해내는 시대에, 나는 나의 작업물 어디에 자의식을 담아야 하는가. 이것이 앞으로 AI 시대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돌파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에 대해서도 배운 바가 있다. 시는 정답을 주기보다 ” 예리한 질문을 던지는 데 소질이 있는 예술 ” 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시를 많이 읽지 않았던 나조차도 이 정의에 깊이 공감했다. 시를 읽을 때면, 그 질문들을 통해 나는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깨닫게 되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 영역을 의식하게 된다. 정해진 해석을 찾기보다, 그 질문 앞에서 나 자신의 무지를 직면하고 사유하는 과정 자체가 시의 역할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문학이 던지는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들은 결국 어디로 향하는가. ” 어떻게 온전한 삶을 살 것인가 ” 라는 개인의 목표와 맞닿아 있다.

내가 생각하고 싶은 궁극적인 지향점은 ” 온전함 ” 이다. 이 온전함은 개인의 완성을 넘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지적으로 정직한 비판을 통해 성취된다.

저자에 따르면 사랑을 통해 온전함에 도달하는 것은 운명적 짝을 만나는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 상대방이 나로 인해 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상호 배려 ” 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이다.

나는 ” 온전함 ” 이라는 이 키워드를 내 삶의 목표로 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는 앞서 고민했던 ” 참을성 ” 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어 그가 더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돕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그를 고무하고 장려하는 태도와 더불어, 반드시 인내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온전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가족과 같은 관계를 통해 얻는 온전함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약간의 결핍을 느낀다.)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고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갈 때 느끼는 개인적인 온전함이다.

더불어, 책은 니체의 말을 인용하여 진정한 비판의 자세를 논한다.

” 진정한 비판은 적의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부분과 맞서는 일이다.”

상대방을 단순화하고 비판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것은 진정한 비판이 아니다. 적의 가장 깊은 곳과 마주할 때, 나의 비판 역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된다. ” 적을 대하는 태도는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 는 문장을 나는 마음 깊이 새기기로 했다. 수많은 정보와 비판이 넘쳐나는 오늘날, 우리는 어렵고 드문 ” 좋은 비판 ” 과 쉽고 흔한 ” 나쁜 비판 ” 을 구별하고, 전자를 지향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이 책을 관통하는 모든 사유는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한다.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곧 선택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저자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를 인용하며,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 ” 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식적인 선택 없이 그저 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 마지막 메시지는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고 생각한 것의 틀 안에 갇히기 쉽다.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더 다양한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수용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할지 의식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결국 이 책이 전하는 가장 ” 심각한 이야기 ” 는 이것이다. 삶은 그 자체로 의미 있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 가치가 우리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

덧붙여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들이 있다. 인간은 긍정적인 신호보다 부정적인 신호를 다섯 배 더 강하게 받아들인다는 것. 그러므로 한 번 비난을 받으면 다섯 번 칭찬을 받아야 마음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는 것.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슬픔에 대한 탐구를 넘어, 우리가 삶의 모든 순간에서 어떤 선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조각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고 진지한 질문을 남기는 책이라고 생각한다.